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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현 프로필

나이 : 1980년 2월 7일  / 전라북도 김제시
키 : 158cm

몸무게 : 43kg

혈액형 : O형

 

가족
아버지 이길술(1933년생), 어머니 노재순, 4녀 중 막내
남편(1983년생, 2019년 4월 7일 결혼 ~ 현재)
딸(2022년 4월 20일생)

반려견 토리


학력
서울개봉초등학교 (졸업)
개봉중학교 (졸업)
명덕여자고등학교 (전학)
성지중·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 / 학사)


종교 : 무종교
소속사 : 파인트리엔터테인먼트
데뷔 : 1996년 영화 <꽃잎>

 

 

 

 

이정현 이야기

1996년의 영화 <꽃잎>으로 데뷔했다. 연기를 처음 해보는 10대 소녀라고는 믿기지 않는 빼어난 연기를 펼치며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고, 대종상, 청룡영화상을 비롯한 다수의 영화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거머쥐며 단번에 충무로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1999년 1집 <Let's Go To My Star>를 발표하며 가수로 변신, 이 음반의 타이틀곡 '와'가 빅 히트하며 이 해 거의 모든 가요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휩쓸었고, '테크노 여전사'란 별명을 얻으며 전국을 테크노 열풍으로 술렁이게 했다. 이후에도 '바꿔', ''너', '줄래', '미쳐', '반', '아리아리' 등 여러 곡을 연이어 히트시키면서 2000년대 초반 국내 인기 정상급 가수로 여겨졌다. 특히 시대를 앞서간 파격적인 콘셉트와 퍼포먼스를 잇달아 선보여, 대중들로부터 레이디 가가에 비견되기도 한다.

2000년대 중후반에는 주로 중국에서 한류 스타로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2010년대부터는 국내에서 연기에 주력하면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수상 등 배우로서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광기, 폭발력 연기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이정현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꽃잎>과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도 이런 면이 제대로 발현된 작품. 그러면서도 정반대의 어린아이나 소녀같은 순수함을 동시에 표현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광기 연기라고 해서 단순히 소리를 빽빽 지르고 감정을 폭발하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완급을 조절하며 입체적인 면모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하는데, 이정현의 장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이러한 야누스적인 면에 있어서는 이정현만한 배우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 여러가지의 복합적인 감정이 교차하는 세밀한 심리 연기도 최고 수준으로 해내며, 오랜 가수 활동으로 다져진 화면 흡인력도 대단히 좋다.

이런 임팩트있는 강렬한 연기가 관객들의 인상에 깊게 남아 있지만, 일상적인 생활연기나 능청스러운 코믹연기도 잘 해낸다. 

 

 

 

 

 

신인배우 시절에는 강약조절이 미숙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30대에 들어서는 <범죄소년>, <스플릿> 등의 작품에서 철부지 미혼모 역할이나 허당 브로커 역할을 모자람없이 연기해 내며 호평을 받았다. 부드러운 감성 연기나 눈물 연기도 수준급. 극을 이끄는 주인공으로서든, 주인공을 서포트하는 역할로서든, 혹은 씬스틸러로서든 연기력 면에서는 빠지는 데가 거의 없는 완성형 연기파 배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여주는 연기의 깊이에 비해서는 드라마에서는 연기가 다소 얕게 나온다는 평이 있다. 이정현은 연기할 때에 캐릭터 연구와 몰입에 많은 시간을 소요하는 편인데, 드라마는 굉장히 스피디하게 촬영을 해야 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특유의 하이톤 때문에 특히 무거운 발성이 필요한 사극에서는 목소리가 튀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현대극에서도 속삭이듯이 조곤조곤 대사를 치는 스타일인데, 조용한 영화관에서 보게 되는 영화에서는 관객의 몰입도를 높이는 장점으로 작용하지만 시청 환경이 상대적으로 산만한 TV 드라마에서는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러모로 드라마보다는 영화에 최적화된 배우라는 평이다.

그리고 연기력의 수준 및 폭 자체에 비해 출연한 작품의 수 자체는 상대적으로 적은데다, 대중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작품들은 대부분 앞서 말한 강렬한 연기가 나타나는 작품들 위주다. 이상하게도 이정현이 일상, 코믹 연기를 한 작품들은 이정현의 연기력 자체와는 별개로 대부분 흥행이나 작품성 면에서 크게 두드러진 결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이정현에 대한 이미지가 강렬한 캐릭터 이미지로 고정되기 쉽다.

30대로 접어든 이후부터는 굉장한 동안미모를 뽐내고 있다. 두시탈출 컬투쇼에 출연했을 때 한 청취자가 동안의 비결을 묻자 "담배를 안 피워서 그런가?"라고 대답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피부가 타고났다는 평이었다. 2015년작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는 민낯으로 잠자는 얼굴을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피부가 아기 피부 뺨치게 깨끗해서 관객의 탄성을 자아냈을 정도. 또한 극중에서 교복을 입고 고등학생 연기를 하는데 아무런 위화감이 없다. 물론 본인은 데뷔 이후 매일같이 팩을 하고 매주 피부관리실을 빠지지 않고 가는 노력을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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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생이지만 2월생으로 빠른 생일이라 1979년생 연예인들과 친구를 맺었다. 만원의 행복 붐 vs 이정현 편에서 노홍철을 친구라고 부르며 말을 놓는 장면이 있고, 김종민과도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근데 80년생들 하고도 말 놓고 친구 사이로 지내는 듯 하다. 2009년 무한도전 올림픽대로 듀엣가요제 편을 보면 1980년생인 전진이 이정현에게 그냥 말 놓고 얘기를 한다.

독창적이고 화려한 무대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가수라는 점에서 '한국의 레이디 가가'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정현이 레이디 가가보다 10년 가까이 앞서 가수로 데뷔했기 때문에 사실은 선후가 바뀐 표현이다. 그러나 무한도전 토토가 출연시에도 '한국의 레이디 가가'로 소개되는 등 대중적으로는 이렇게 많이 인식되고 있다. 또한 레이디 가가의 충격적인 등장 후 ‘한국에는 이정현이 있었다’는 식으로 이정현의 퍼포먼스가 재평가를 받은 면도 있다.

 

그 외에도 가수와 배우 양쪽으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루고 있는 점, 단신(150cm대)이라는 점도 비슷한 면이다. 2009년 레이디 가가 내한 공연 당시 레이디 가가가 이정현의 퍼포먼스에 반해 요청을 해 이정현이 오프닝을 맡기도 했다. 레이디 가가가 이정현의 영향도 받았다는 말도 있다.

3인칭화 말투도 잘 쓴다. 지금은 그다지 잘 쓰는 것 같진 않지만 20대 초반에는 팬들한테 "정현이는요, 여러분을 사랑해요."라고 인사할 정도로 3인칭화 말투를 많이 썼다. 한때 이정현 성대모사 도전하는 연예인들이 자주 써먹던 대사이기도 하다.

바비인형 덕후로 알려져 있다. 집에 꽤 많은 양의 바비인형을 콜렉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인도 이걸 잘 활용해서 '줄래'와 'V' 뮤직비디오 등에서 바비인형을 이용한 연출을 하기도 했다.

이정현의 가수로서의 활발한 활동은 그녀의 연기력이 큰 일조를 하였다. 지금이야 다시 보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바꿔'의 무대의상과 안무마저 당시에는 카리스마 여전사라며 평가받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눈빛 연기와 무대 장악력을 보였고, 앨범 때마다 수많은 콘셉트의 변화를 줬음에도 전혀 무리없이 소화하고 가요의 중심에서 멀어지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절륜한 가창력까진 아니더라도 자신의 하이톤을 댄스 음악에 맞춰 이 정도까지 라이브로 소화할 수 있던 여성 가수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시절이었고 끊임없이 새로운 걸 보여주며 대중이 자신에 기대하는 요구를 만족시키던 이정현은 한 시대를 풍미한 여성 솔로 댄스 가수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활동 당시 KBS에서는 복장 규제를 당했는데, 이정현이 착용한 대형 비녀가 폭력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믿기지 않겠지만, 해당 서적의 213페이지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다. 당시 네티즌들은 그럼 사극도 방송 금지하라라면서 해당 방송사를 비웃었다. 오래 전 사건이라 기사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지만 당시엔 지상파의 후진성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며 논란이 일었다. 사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연예인 패션 규제가 매우 엄격했다. 지금이야 타투만 가리면 되지만, 당시에는 머리 염색이나 피어싱도 금지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남자 아이돌의 필수 아이템인 아이 라인이나 세미 스모키 메이크업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당신은 베토벤을 죽였습니다의 실제 사례자가 될 뻔 했다. 2000년대 초반 모 매체의 기사에 따르면, 어머니가 그녀를 임신했을 당시 노산이었기 때문에, 낙태를 고민했다고 한다. 지금이야 30대 후반 임산부가 흔해서 노산 축에도 들지 못하지만, 저 당시 의학 수준으로는 위험성이 컸으며, 이미 네 명의 자녀가 있어서 육아 부담도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언니들에게 귀여움을 받으면서 성장해서 가정 분위기는 화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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